(향토사 연구원 이만유)문경의 지명은 신라시대에는 고사갈이성, 관현(冠縣), 관문현(冠文縣)이었고 통일신라시대에서는 관산현, 고려시대 때는 문희(聞喜)였다가 문경(聞慶)으로 바뀌어 조선시대를 거쳐 지금까지 문경(聞慶)으로 불리어왔다. 문희, 문경은 들을 문(聞), 기쁠 희(喜), 경사 경(慶) 자로 기쁘고 경사스러운 소식을 듣는다는 기분 좋은 지명이다. 조선시대 영남의 선비들이 장원급제를 바라며 청운의 뜻을 품고 한양으로 과거시험을 보러 갈 때나 전국의 보부상들이 대박을 꿈꾸며 팔도를 다닐 때 주로 이용했던 고갯길이 문경새재다. 한양으로 가는 대표적인 큰길로 추풍령, 문경새재(조령), 죽령이 있었지만, 속설에 의하면 추풍령으로 가면 추풍낙엽처럼 떨어지고 죽령으로 가면 죽 쓴다거나 죽 미끄러진다고 하여 경사스러운 소식을 듣는다는 문경으로 가는 길을 많이 이용하였다고 한다. 이러한 연유인지 예로부터 문경은 기쁜 소식을 듣고 경사스러운 일의 조짐이 있다는 뜻으로 “문희경서(聞喜慶瑞)의 고장”이라 했다. 그리고 또 문경에는 “문경삼관(聞慶三關) 대한삼경(大韓三慶)”이란 말이 있다. 선견지명이 있는 옛사람들이 그 지방의 역사와 문화, 풍토와 지형, 천문지리를 관찰하여
(문경구곡원림보존회 초대 회장 이만유)구곡(九曲), 구곡원림(九曲園林)이 뭔가? 지역마다 있는 팔경(八景)은 누구나 알고 있는데 구곡이라니? 한때,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10여 년 전인 2013년 이전까지 문경에서는 상당한 식자층에서까지 구곡이 뭔지 제대로 아는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했다. 2012년 11월 15일 필자가 발의하고 26명이 동참하여 두 차례의 추진위원회 회의를 거쳐 2013년 1월 15일 문경문화원 2층에서 전국에서 처음으로 순수 민간인들이 뜻을 합쳐 구곡원림을 조사, 연구, 보존하고 구곡문화를 계승 발전하기 위한 “문경구곡원림보존회 창립총회”가 개최되고 난 뒤 신문, 방송 등에서 다투어 보도하고 구곡 사진 전시회 등으로 구곡을 알림으로써 점차 구곡을 알게 됐다. 하루는 경찰서 정보과에서 전화가 왔다. 경찰서 그것도 정보과, 뭐 잘못한 것도 없는데 가슴이 철렁! 웬일일까? 했는데, 내용인즉 경찰서장께서 이즈음 문경에서 구곡, 구곡 하는데 구곡이 뭐냐? 하고 간부회의 때 질문을 하니 구곡에 대해 제대로 아시는 분이 없어 전화했다고 하여 요약해서 설명해 준 적이 있었다. 그 외에도 많은 사람이 궁금해 하고 알고 싶어 했으며, 그때 구곡이 문경 지역
(향토사 연구원 이만유)절대왕정 또는 절대군주제 하의 왕이 다스리는 시대는 아니지만 지금도 한 국가의 최고 권력자인 대통령의 권한과 책무는 그때와 비교할 수 없지만, 그에 못지않게 크다고 할 수 있다. 대한민국은 1919년 4월 11일 상해 임시정부 수립을 시작으로 하여 광복 이후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하고 자본주의와 자유민주주의를 기반으로 하는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됐다. 대한민국 헌법 제1조에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고 했다. 이렇듯 대한민국은 자유민주주의 국가로서 국민이 주인인 시대에 살고 있다. 왕은 아니지만 한 국가를 대표하는 국가 통치자로서 대한민국 역대 대통령이 문경을 방문했던 발자취를 더듬어보며 단편적이나마 문경과 함께한 근현대 역사를 살펴보기로 한다. 1. 이승만 대통령 대한민국 초대, 제2대, 제3대 이승만 대통령의 문경 방문은 1957년 9월 26일 문경시멘트(쌍용양회 문경공장) 공장 준공식 때였다. 국내 최초의 문경시멘트 공장 건립은 국제연합한국재건단(UNKRA) 재정 지원을 통해 1955년 11월 30일 기공하여 1957년 9월
(전 한국문인협회 문경지부장 이만유)窮不失義 達不離道(궁불실의 달불이도) 아무리 어려움에 처하더라도 의로움을 잃지 말며 거침없이 잘 나아갈 때도 정도에서 벗어나지 말라. 맹자 진심편에 나오는 글이다. 몇 년 전 한국문인협회 문효치 이사장 취임사 중에 “문인은 선비이고 선비는 명예를 존중한다.”라는 내용이 있었다. 평소 필자도 “시인은 이슬을 먹고 사는 선비다.”라고 생각해온 터라 공감하였기에 선비란 무엇인가에 대해 다시 한번 되새겨 보았다. “선비란 곤궁에 처해도 의(義)를 잃지 않고 소신을 지키는 사람”이라 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학식과 덕망을 갖추고, 예절을 알며, 말과 행동이 같으며 의리와 원칙을 지키고, 불의에 대항하며, 정의로우며, 관직과 재물을 탐하지 않는 고결한 인품을 지닌 사람으로 궁극적으로 인류가 추구해야 할 이상적인 인간상이다. 라고 정의할 수 있다. 그리고 선비란 그 시대의 지성인, 지도층, 엘리트로써 나를 다스릴 줄 알고 남을 다스릴 줄 아는 사람, 자기에게 엄격해야 한다고 믿는다. 조금은 우스운 이야기로 선비(양반)는 물에 빠져도 개헤엄을 치지 않는다. 얼어 죽어도 곁불은 안 쬔다. 선비는 비가 와도 뛰지 않는다. 라는 말이
(아리랑도시문경시민위원회 위원장 이만유)코로나19 확진자가 3월 17일 기준, 하루 신규 확진자 621,328명, 총 누적 확진자 수는 8,250,592명이며, 하루 사망자는 429명, 누적 사망자는 11,481명(치명률 0.14%)이라고 밝혔다. 코로나 발생 이후 하루 확진자가 가장 많은 놀라운 상황이다. 2019년 12월 중국 우한에서 처음 발생한 이후 한국에서는 2020년 1월 20일 첫 번째 코로나19 확진자가 발생했다. 발명 당시 급속한 전파력과 치명률이 높고 백신도 치료 약도 없는 긴급사태에서 전 인류가 공포에 휩싸였다. 사람들이 이 대재앙을 맞아서 할 수 있는 것이라곤 기껏 거리두기, 마스크 쓰기, 손 씻기 등의 기초적 방역 수단밖에 없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노래로서, 특히 아리랑으로서 코로나를 극복하자는 의지를 담은 코로나아리랑을 2017년 아리랑 연구, 보급, 전승을 위해 창립된 국내 유일한 순수 민간단체인 “아리랑도시문경시민위원회”가 전국 최초로 자체 역량을 발휘, 창작하여 2020년 7월 14일 발표회를 개최한 이후 “찾아가는 아리랑학교”와 각종 공연, 유튜브, SNS 등의 매체를 통해 보급했다. 질병으로 인한 국가적 환난이 발생하였을 때
(전 향토사연구위원 이만유)희망을 가득 품은 밝고 둥근 달이 떠올랐던 임인년(壬寅年) 정월 대보름, 올해는 코로나로 인해 달집태우기 등 행사 없이 조용히 지나갔다. 음력 정월 보름날을 상원(上元)이라 해서 옛적에는 설날보다 더 성대한 명절로 보냈으며 여러 가지 풍속이 있었다. 그중 가수(嫁樹), 즉 “나무 시집보내기”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고자 한다. 우리 민족은 심성이 착하고 정이 많다. 노벨 문학상을 받은 펄 벅 여사가 한국을 방문했을 때, 추운 겨울을 나는 새들을 위하여 나뭇가지 끝에 까치밥을 남겨 놓거나, 노을이 붉게 물드는 저녁에 밭에서 일을 마치고 귀가는 농부가 하루 종일 힘들게 일한 소에게 미안하다며 소와 함께 짐을 나눠지고 가는 모습을 보고 감탄하며 미물에게도 사랑을 베풀고 배려하는 마음에 감동하여 “한국은 고상한 민족이 사는 보석 같은 나라다”라고 했다. 우리 조상들은 농사를 지으면서 씨앗을 뿌릴 때도 한 구덩이에 3개를 뿌린다. 하나는 하늘을 나는 새를 위해, 하나는 땅에 있는 벌레를 위해, 그리고 나머지 하나는 사람이 먹기 위함이란다. 이렇게 우리 민족은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생명과 더불어 살며 한 가족이라는 인식을 가지고 살았다. 옛 문헌
(전 향토사연구위원 이만유)서기 867년 경북 문경 땅에 왕이 태어났다. 고전에 밤에 찾아온 손님이라는 “야래자 설화(夜來者 說話)”에 의하면 가은읍 갈동 아차마을에 한 부자가 살고 있었다. 그에게 예쁜 딸이 있었는데 밤이면 이목이 수려한 자줏빛 옷을 입은 초립동이 나타나 처녀와 정을 나누다가 새벽이면 사라지고 또다시 밤이면 나타나길 무릇 수개월이나 됐다. 결국 처녀는 아이를 잉태하여 어찌하는 수 없어 부모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그러자 부모는 오늘 밤 그 사내가 오면 평상시와 똑같이 하되 몰래 바늘에 실을 꿰어 옷자락에 매어 두라 하였다. 날이 밝자 실을 따라가 보니 굴 안으로 들어갔다. 그 굴속에는 옆구리에 금빛 띠를 두른 큰 지렁이가 몸에 실이 감긴 채 누워있었다. 그 후로 초립동이 나타나지 않았고 10개월이 지난 후에 처녀는 옥동자를 출산하였으니 그 아이가 후백제 왕 견훤이다. 그 뒤 굴속에서 풍악이 울려 나왔고 그 소문을 들은 구경꾼들이 몰려들어 마을에 피해가 심하였다. 그리하여 주민들이 굴을 그만 메워버렸다. 그런 후로 풍악소리가 사라지고 마을에는 불상사와 불운이 겹쳐 일어났다고 한다. * 이와 똑같은 야래자 설화는 후백제 시원지 광주(무진주) 북
(이만유) 피 끓는 나이 약관, 스무 살에 장렬히 산화하신 6·25전쟁 호국영웅 님이시여! 그날, 산천도 울고 하늘도 울었습니다 그러나, 님이 있어 오늘 이 땅이 있고 여기 우리가 있습니다 백척간두에 선 대한민국 그 운명이 걸린 “인천상륙작전 교두보를 확보하라”라는 첩보대의 지상명령 이미 북한군이 점령한 덕적도와 영흥도를 탈환해야 하는 막강한 임무를 부여받은 님은 불타는 용기와 애국심으로 작전을 수행하셨으니 장하도다 그 이름 특수 상륙부대, 해군 육전대 1소대 1분대장 박동진 중사 1950년 8월 18일 덕적도를 점령하고 이어 8월 20일 새벽 영흥도 탈환 작전에 돌입 치열한 전투를 수행하시다 마지막 발악하는 잔당을 맞아 부하들을 안전한 곳에 두고 단독으로 적진을 향해 뛰어나가 첫 번째 수류탄에 이어 두 번째 수류탄을 투척한 순간 애석하게도 적의 탄환이 가슴을 관통 장렬히 산화하시니 아! 슬프도다 님이시여! 님의 불타는 가슴에서 애국의 붉은 피 솟구치던 그날, 고향 주흘산도 울고 영강도 울었습니다 님이시여! 인천상륙작전을 성공시킨 전투 승전의 북소리 지금도 높이 울리고 충무무공훈장에 빛나는 자랑스러운 문경의 아들 대한민국의 건아여! 6·25전쟁 영웅이시여!